<공연리뷰> 연극 '삼등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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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두 달 앞둔 말년병장 윤진원(김태훈 배우)은 성병삼 이병의 탈영사실을 보고한다. (사진=강일중) |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남자들의 지나간 군 생활에 대한 추억은 저마다 다르다. 악몽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름대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는 이도 있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적응하다 보니 배운 것도 많이 있었다는 얘기다. 어느 쪽이 됐건 거의 모든 징집병은 입대하는 순간부터 남은 복무일수를 센다. 한국 남자들이 꾸는 최악의 악몽 중 하나는 분명히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는데 꿈속에서 징집영장을 다시 받는 것이다. 그만큼 군 생활이 주는 정신적 압박감은 크다.
서울 대학로의 학전블루 소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 '삼등병'이 그리는 것은 그 심리적 억압감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또는 위기상황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고와 행동에서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장면과 무대장치는 무척 단순하다. 후방의 한 군부대에서 야간에 한 조가 되어 보초를 서는 선참자와 졸병의 얘기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연극의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뒤로는 철책이 있고 오른쪽에 철책 밖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감시초소 느낌의 간이 시멘트 구축물이 있다. 그 안에는 군대전화가 놓여 있다. 왼쪽으로는 보초가 초소 접근자에게 암구호를 외치며 수하하는 은폐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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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영하려는 성병삼 이병의 처리를 놓고 고참병장 윤진원과 갓 상병이 된 박기언은 이견을 보인다. 왼쪽부터 성병삼 이병 역 박혁민-윤진원 역 김태훈-박기언 상병 역 이현균 배우. (사진=강일중) |
내용도 처음에 보면 너무 뻔한 얘기 같다.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고참 병장은 보초 근무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졸병을 데리고 논다. 시를 외어보라고도 한다. 겁을 주기도 하고 원산폭격 자세를 시킨다. 겁에 질린 신병은 부동자세로 고참의 지시를 복명복창해 가며 노리개가 된다. 남자라면 쉽게 상상이 되는 장면이다.
어쩌면 가해자처럼 보이는 말년병장 조택기가 신병 윤진원 이병을 데리고 노는 것도 스스로 생존의 길을 찾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듯 보인다. 그는 이렇게 토해낸다. "아, 지겹다. 뭘 해도 지겹다. 뭘 안 해도 지겹다. 지지리도 지겹다." 지겨움에서 탈피하기 위해 그는 윤진원에게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게 하고 극작가 이강백의 '파수꾼'을 소재로 함께 연극놀이를 벌인다.
윤진원 이병의 선택은 극적이다. 극의 처음에 그는 군대 조직문화의 피해자처럼 보인다. 뭔가가 정서적으로 통하는 다른 말년병장 이종문과는 계급이 다르지만 친구와 같은 우정을 나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가 이제 제대 두 달을 남겨놓은 고참 병장 시점이 될 때까지 그의 사고와 행동은 이성적이고 선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졸병의 어리광스러운 짓거리나 잘못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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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 병장(김성현, 왼쪽)과 윤진원 일병(김태훈)은 계급을 넘는 우정을 나눈다. (사진=강일중) |
그러나 같은 부대의 신병 성병삼이 탈영을 시도하고, 달래는 윤진원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윤진원의 소총까지 빼앗아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의 태도는 돌변한다. 이제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총기를 탈영병에게 빼앗긴 사실이 알려지고, 그 때문에 이제 2개월밖에 남지 않은 제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대처는 극한상황 속에 인간이 살아남으려고 평소에 견지하던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을 얼마나 쉽게 버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윤진원의 선택은 그가 졸병 시절 '파수꾼' 연극놀이를 하면서 소년 파수꾼으로서 했던 선택과 오버랩된다.
결국 이 작품이 그리는 것은 시시콜콜한 군대 생활의 스케치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다. 실존적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삼등병'은 진지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억제한다. 오히려 웃음을 자극하는 등장인물의 대사와 연기로 겉을 포장했다. 남자들에게는 군 생활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여자 관객들에게는 시와 연극의 이야기를 통해 감성을 자극한다.
군 생활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용하다. 진부한 소재로 만든 연극이 재미가 있고, 감동이 있고,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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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고참병장 조태기는 쫄병 윤진원을 데리고 파수꾼 연극놀이를 한다. (사진=강일중) |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윤진원 역 배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배우들은 모두 1인 다역을 한다. 모두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윤진원 역의 김태훈은 이번이 데뷔 무대. 그러나 데뷔 무대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연한다. 특히 지난 6일의 공연에서 탈영병이 돌려준 개인 소총을 받아든 순간 안도의 숨을 토해내는 장면이나 말년병장 앞에서 겁에 질린 상태에 놓인 그의 표정 등 몇 개 장면에서 보인 그의 연기력은 돋보였다.
제목의 '삼등병(三等兵)'은 존재하지 않는 계급이다. 군대의 가장 낮은 신병 계급인 이등병보다 못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연극은 커튼콜이 특이하다. 네 명의 출연진이 모두 각자 자신이 군대생활을 했던 부대의 이름과 제대날짜를 외치며 전역보고를 하는 것으로 연극은 끝을 맺는다.
병장 이현균(조태기 병장 등 역)은 2005년 8월 29일부로 제27사단 수색대대에서,
병장 김태훈(윤진원 역)은 2008년 11월 24일부로 제7사단 5연대 1대대에서,
수병 김성현(이종문 병장 등 역)은 2003년 7월 27일부로 경기지방경찰청 용인경찰서 소속 제299중대에서,
병장 박혁민(성병삼 이병 등 역)은 2001년 8월 14일부로 제6사단 7연대 1대대에서
각각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 연극 '삼등병' =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대표 성기웅) 제작.
만든 사람들은 ▲작ㆍ연출 성기웅 ▲조연출 김진영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김광섭 ▲의상디자인 홍문기 ▲음악ㆍ음향 변준섭 ▲목소리 출연 백현주 ▲사투리지도 김영록.
공연은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6월23일~7월10일. 공연문의는 학전 ☎02-763-8233.
ringcy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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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9 17:01 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