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老兵이 걸어온 길-53-압록강을 향하여-

우리 1사단이 평양을 점령한 10월 19일 저녁, 느닷없이  7사단 8연대장 김용주(金龍周·준장 예편) 대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도 평양에 진격해 왔다”고 했다. 7사단이면 분명히 2군단 소속인데 어떻게 미1군단 작전구역으로 들어왔나 싶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잘왔다는 말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뒷날 7사단이 “우리가 평양진격 1착 부대”라고 주장해 알게 된 경위지만, 중부 내륙지역으로 진격하던 7사단은 정일권 육군총참모장 명령에 따라 진로를 평양으로 바꾼 것이었다. “평양만은 국군이 제일 앞장서서 들어가도록 하라”는 이승만 대통령 명령을 받은 정총장이 유재흥 2군단장에게 지시한 것이다. 이대통령은 우리 1사단이 미1군단에 배속돼 평양으로 가고 있는 사실은 알았지만, 출발이 늦어 미군에게 평양 선착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던 모양이다.


나는 평양에서는 하룻밤밖에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사단사령부 안에서 지새운 밤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한국군 젊은 사단장의 감회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미1군단으로부터 계속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에게 잡혀간 미군 포로들과, 대한민국 정부 및 사회 요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평양 북방 순천(順川)과 숙천(肅川)에 투하할 미187공정사단과의 링크 업(link up) 작전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숙천까지 56㎞, 순천까지는 60㎞나 되는데 지상 우군의 연결이 없으면 공정부대는 적진에서 고립된다. 우리 1사단에게는 ‘태스크 포스 그로든(Task Force Growden)’ 임무가 부여돼 그로든 미6전차대대 1개 전차대대에 보병 1개 대대를 탑승시켜 신속히 순천으로 진격시키고, 영국군 27여단은 숙천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순천으로 갈 준비를 서두르던 20일 아침, 미2사단 ‘인디언 헤드’ 마크를 부착한 한 미군 중령이 약 1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자기들은 GHQ(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수집반인데 평양 시가지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허락하자 그들은 즉각 평양 시내 공공건물들을 수색해 수많은 문서를 노획, 도쿄 GHQ로 실어 갔다. 그들은 문서수집만을 목적으로 GHQ가 급히 편성해 파견한 부대였다.


평양을 떠나기 직전, 나는 평양형무소에 가 보았다. 형무소 구내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우물마다 거꾸로 틀어박힌 시체들로 악취가 진동했다. 수감됐던 정치범들과 남쪽에서 붙잡혀 끌려온 우익인사들의 비참한 최후였다. 감옥 문들이 모두 열어젖혀진 우중충한 벽돌건물 모습은 지옥을 연상케 했다. 평양 만수대 북조선 인민위원회 건물의 김일성 집무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텅 빈 집무실에는 커다란 탁자와 회전의자만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회전의자에 한번 앉아 보고는 이내 평양을 떠났다.


순천으로 가는 길가에서 우리는 수많은 투항자를 만났다. 그 많은 포로를 실어 옮길 교통수단도 없고 갈 길도 멀고 해서, 후속부대에 뒤처리를 맡기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순천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미 공정부대가 투하되고 있었다. 수많은 낙하산이 하늘 가득 꽃을 피우며 내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병력뿐만 아니라 트럭·스리쿼터·야포 등 온갖 장비도 낙하산으로 투하됐다. 그중에는 90㎜ 대전차포와 105㎜ 포도 17문이나 섞여 있었는데, 105㎜ 포 공중투하는 이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날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이 평양비행장으로 날아왔다. 그는 공정부대 투하작전을 지켜보고 평양에 내려 1기병사단 F중대를 사열하고 “3개월 전 한국에 상륙할 때부터 참전한 용사는 앞으로 나와 보라”고 말했다. 앞으로 나온 사람은 200명 가운데 5명뿐이었다. 그간의 치열했던 격전에서 미군의 인명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게 하는 일화다.


/ 2008.08.06  /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