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병 183명을 이끌고 화개장터 뒷산에서 북한군 6사단의 선봉을 저지한 정태경 중위(예비역 육군 중령·사진)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1928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광산학과를 졸업하고 육사 8기생으로 임관한 고인은 전주에서 5사단과 7사단의 낙오 병력으로 급조된 15연대 소속으로 여수 순천 지역의 학도병을 모아 국군의 서부 측면 최전선에서 7월 25일 새벽 적과 맞섰다. 화개장터전투는 학도병이 투입된 최초의 전투로 손꼽힌다.
낙동강 방어선에 주력을 투입했던 국군과 미군은 오랜 장마 뒤에 정찰기를 띄우고서야 인민군 6사단이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하동 부근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하고 대경실색했다. 자칫 하동·마산을 뚫리면 피난 수도 부산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적과 조우한 정 중위의 학도병들은 화개장터 뒷산 전투에서 압도적 화력의 적을 만나 50명이 죽거나 실종되면서까지 3시간 30분을 버텼다.
급히 달려온 미군은 이틀 뒤인 27일 하동 쇠고개에서 전투를 시작, 30일 진주로 후퇴하기까지 전사와 실종 349명, 부상 52명, 포로 100여명이라는 최악의 희생을 치렀지만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남은 학도병을 이끌고 미군과 함께 싸운 고인은 초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 이 전투에 참가했던 채병덕 장군의 전사를 옆에서 목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인민군의 진격은 진동전투에서 우리 해병대와 미 25사단에 의해 결국 막혔다. 미군 정보당국이 'splendid(인상적인)' 기동이라고 평가했던 적의 진격을 학도병들이 3시간 30분 저지한 덕분에 한미 양국은 병력을 급파할 시간을 벌어 부산 서쪽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학도병들과 함께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던 고인은 휴전 성립 후 주로 군 교육기관에서 교수 요원으로 지나다 1968년 중령으로 예편, 광업공사에서 일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용란(90)씨와 2남(정헌 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정권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2녀(사위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김효명 전 고려대 의료부총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