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 부대의 역사 - 연승 부대편
칠성은

칠성 부대의 역사 - 연승 부대편

칠성 1 45,612 2006.11.0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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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창립(연대편) - 연승 부대


시련없이 영광없고 역경없이 기쁨없다 했던가. 연승 부대의 역사를 조사해 본 즉 과히 기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강한 부대라고만 한다면 기쁨과 영광이 함께 하겠고 후배들이 매우 행복하게 하겠지만 그 영광이 어찌 부대원들만 노력한다고 만들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앞서 사단 창립까지 본 연후에는 각 연대별 내용을 살펴 보고자 한다. 그런데, 각 연대의 역사는 1950년 이전까지만 별개이고 그 이후에는(1950년 9월 이후에는) 사단과 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가장 치열했던 1950년까지를 보는 것으로 하자.
이 글에서는 상승연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려고 한다.

- 한국전쟁 전(6월 24일까지)
- 의정부 지구 전투(6월 25일~6월 26일)
- 서울 방어 전투(6월 27일 ~ 7월 4일)

아울러, 최초에 창설된 단자리 부대 중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부대는 몇개가 되지 않는다. 반란 사건에 연루가 되어 연대 번호가 없어지거나 불미스런 일로 인해서 연대 번호가 바뀌거나 하였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단자리 부대들은 현재의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라고 봐야 한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친 연승 부대도 우리 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니, 그때 당시의 실수나 가슴아픈 역사를 너무 크게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한다.

1. 한국전쟁 전(6월 24일까지)

1949년까지 한반도의 남쪽은 심한 혼란에 쌓여 있었다. 여수, 순천에서는 군 내 반란이 일어났고 제주도에서는 민과 군경이 충돌하여 폭동 사태로까지 번졌다. 대구에서도 반란 사건이 일어났으며 지리산 쪽으로는 무장 게릴라가 활동을 하였다. 1950년에 들면서 국제 정세도 문제거니와 한반도의 북쪽에서도 조짐이 보였다. 특히 1950년 5~6월은 전방과 후방에서 극명한 긴장 상태가 나타났었다. 그러던 것이 갑작스런 평화 회담 제의가 나오면서 6월 24일까지 유지되었던 비상 대기령이 해제가 되었다. (물론, 연승 부대(부대장 이상근 중령)는 6월 1일자로 제 7사단에서 수도경비사령부로 소속 변경된 상태였다. )

그때 당시 제 7사단은 제 2사단과 함께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담당하고 있었고 적 침공시 주공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긴장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3개 연대로 구성된 부대에서 제 1연대와 제 9연대만 남기고 제 3연대(연승 부대)를 서울지역으로 뺀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2. 의정부 지구 전투(6월 25일~6월 26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초기 대응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성토하는 의견이 많다. 항시 대기해야 하는 군인의 임무를 잃어버렸다고 질책하는 시선도 많다. 그렇다면, 처음에 맨손으로 탱크를 막고 전투 경험이 매우 많았던 중공군 출신 침공군과 맞서서 대등하게 싸웠던 장병들은 바보였단 말인가.
최초에 전투가 시작되었을때, 육본에서는 서울에 있던 연승 부대를 제 7사단으로 복귀시켰고 연승 부대는 포천쪽에서 적과 조우하여 포천 송우리에서 방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축석령 부근에 진을 치지 않고 송우리에 진을 치는 바람에 적 전차부대와 맞서지도 못하고 패퇴하여 아군 피해를 입은 채 급히 동두천 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이 첫 전투를 곱씹어 봐야할 필요성이 있다. 연대장인 이상근 중령은 부대가 배치를 마칠 즈음에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적에 대한 정보고 없이 그저 일상적인 도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경황이 없는데 어떻게 소총만 가진 부대가 적 전차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전투지 이탈을 하였다.(탈영인지 실종인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지휘관도 없어진 부대를 작전 참모가 지휘하여 후방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한다.

급박했던 25일이 지나고 제 7사단과 함께 제 2사단도 동두천 방어선이 무너져서 의정부로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채병덕 참모총장은 제 7사단장이던 유재흥 장군을 "의정부 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제 2사단을 함께 이끌도록 하였다. 그러나 밀려오는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서는 병력을 집결시켜 한번에 반격해야 효과적인데, 분산하여 적을 공격하다보니 적 전차를 부술만한 힘도 없었을 뿐더러 숫적으로도 열세인지라 거듭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승 부대는 양수리쪽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수유리쪽으로 집결하였다. 이때부터 서울 방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3. 서울 방어 전투(6월 27일 ~ 7월 4일)
제 2사단과 제 7사단은 철수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포천-동두천-의정부를 방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휴가 나간 장병들의 복귀도 늦었을 뿐만 아니라 화력 면에서도 열악하였고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대응을 못해 결국 창동까지 밀렸다. 그래서 27일 미아리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서울 방어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때, 연승 부대는 수유리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기타 부대는 홍릉, 수유리, 미아리 등에 산개하여 각자 방어에 돌입하였다. 또한, 포병학교, 사관학교, 보병학교 등에서 생도별로 부대가 구성되어 개별적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개별적인 접전으로 인해서 효과는 보지 못한채 병력 손실만 가중하였다.)
이미 대통령은 대전으로 이동하였으며 전선은 치열해졌는데, 27일 밤에 적 전차가 미아리 전선을 넘어 홍릉 방면으로 진출을 하게 되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갑작스레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전선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데, 후방의 지휘관들은 결전하겠다는 각오보다는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여주어 결국은 초반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강북에 남아 있던 병력과 물자 및 화기 등은 고스란이 침공군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에 건너 오고 있던 피난민과 병력들도 폭파로 인해 차량이 한강에 직접 떨어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제 7사단은 약 400명 정도만 도강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사실상 7월 4일 이후로는 부대가 해체된 셈이라고 봐야 한다. (연승 부대도 마찬가지.)
후퇴에 성공한 부대들은 낙오병까지 섞어서 혼성 부대를 결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제 7사단은 노랑진~동작지역을 방어하였다. 6월 28일, 맥아더 장군이 전선으로 직접 날아와서 흑석동과 동작동을 방어하는 제 7사단 장병을 격려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맥아더 장군이 "필요한게 없냐"고 묻자 그 장병은 "무기가 부족하니 무기를 달라"고 하여 맥아더의 임전의지를 불태웠다고 하는데,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7사단 장병은 확실하다고 한다.
그러나 7월 3일 경에는, 다 폭파되지 아니한 한강 철교를 보수하여 적 전차 4대가 도강해 옴에 따라서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안양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제 7사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재편될때까지 타 부대로 흡수되어 사실상 해체된 상태로 2개월 가까이 지냈다.


포천과 동두천을 맡고 있던 제 2사단과 제 7사단은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춘천과 동해안을 지키던 제6사단과 제 8사단은 오히려 적에게 반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제 1사단 역시도 침공해오는 적을 맞이하여 밀리지 않을 정도로 싸웠다. 하지만, 서울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철수를 감행했으니, 그 때문에 제 2사단과 제 7사단은 한국전쟁 초기에 매우 큰 불명예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초반의 전투 양상에서,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라 하더라도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에는 한계가 있고 또 경기 수도권의 경우 6월 24일에 용산에서 연회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휘력을 탓할 수만도 없다고 본다.
다만, 제 7사단 장병들이 초기 개전 상태에서 총을 버리고 부대를 이탈하지 아니하고 한강을 넘을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낙동강 전투 이후 평양 입성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증명하였다.


* 참고 문헌
- 한국전쟁사, 전쟁기념사업회, 1992

본 내용은 해당 서적을 통해서 발췌한 내용임을 밝힘.

* 칠성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1-06 15:00)

Comments

칠성관리자 2006.11.06 15:01
  사진은 연승부대 창설 기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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